"의외로 공화정 로마 문돌이 중에는 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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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전

기원전 51년 - 원해서 온 게 아니라 전직 집정관 to부족으로 반쯤 울며 겨자먹기로 온 것이지만,
로마의 동방속주 중 요충지이자 총독들에게는 헬무지로 악명높은 킬리키아 속주로 부임해
민생이고 치안이고 개판이 난 속주를 다시 회복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던 키케로에게
그가 가장 두려워하던 소식이 닥쳤다.
몇 년 전 카르헤 전투에서 대승해, 크라/수스를 만들고 로마 역사에 손꼽히는 치욕의 대패를 안겨 준 뒤
롬평 = 크라수스란 인식이 박혀 로마를 덩치만 컸지 순 ㅈ으로 여기게 된 동방의 파르티아 제국이
마침내 크라수스의 침공에 대한 보복이란 명분을 내세워, 로마령 동방속주를 역으로 침공했던 것이다.
그나마 희망적인 사실은 카르헤의 명장 수레나스는 진작에 파르티아의 민속놀이 - 왕권에 잠재적 위협이 될 수 있는
대승을 거둔 장군에 대한 숙청 - 를 당했다는 것이었지만
대신에 파르티아 샤한샤(왕중왕) 오로데스 2세의 왕자, 파코루스가 실질적 지휘를 맡을 고위 장군의 보좌를 받으며
파르티아 제국의 진심펀치라 할 만한 대군을 끌고 유프라테스 강을 넘어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키케로가 바로 이런 상황을 더없이 우려했기에, 그동안 군기가 빠지고 진영을 무단이탈한 병사도 수두룩하던
킬리키아 속주 주둔 2개 군단을 빡세게 충원하고 훈련시켜 로마 동방군 중에는 제일 빠릿빠릿한 군단으로 만들어 놓았고
로마의 속국 갈라티아의 데이오타루스 왕도, 로마식으로 훈련시킨 갈라티아 군단을 지원군으로 보내주었다는 것이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군 빛나회에서 군단장으로 대활약했고, 지금은 형의 총독 수석보좌관으로 동행했던
동생 퀸투스 키케로의 조언에 힘입어, 키케로는 실전 지휘는 처음이지만 대응 전략을 잘 수립했다.
전 병력을 이끌고 국경의 타우루스 산맥으로 가서, 비좁은 산속 고갯길을 틀어막았던 것이다.
이 곳은 킬리키아 속주로 파르티아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으면서,
여차하면 옆의 시리아 속주를 지원하러 갈 수도 있는 요충지였다.
키케로의 기병대가 정찰 중이던 파르티아군 선봉을 격파하자, 킬리키아 속주 공격을 포기한 파르티아군은
원정의 목표를 하향조정해서, 옆에 있는 부유한 시리아 속주를 집중적으로 노렸다.
전임 시리아 총독 크라/수스가 멋대로 저지른 동방원정을 완전히 말아먹고 저승으로 보직해임된 뒤
총독 대리를 맡고 있던 재무관 카시우스 - 나중에 카이사르 암살에 동참할 그 양반 맞다 - 는
카르헤의 대참사에서 그가 그랬듯 죽다 살아서 돌아온 1만여 명의 패잔병들을 이끌고 방어전에 임했다.
이 전력차론 평야에서 정면으로 결전을 벌이는 건 자살행위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던 카시우스는
시리아뿐만 아니라 로마령 동방속주 전체의 심장격인 대도시, 안티오크에서 철저한 농성전에 들어갔다.
공성전이 예상보다 지지부진하자 파르티아군은 이웃 도시를 공격하러 갔는데
바로 이 때, 카시우스는 파르티아 기병대에게 쥐약이라 할 만한 지형인 근처 숲이 우거진 곳으로
적군을 유인하여 매복 작전에 걸려들게 하는 데 성공했다.
큰 타격을 입은 파코루스 왕자는 부왕의 꾸지람을 걱정하며 철군할 수밖에 없었고, 로마는 어느 정도까지는 설욕에 성공했다.
암튼 그래서, 문약한 뜌땨 이미지(팩트다)와는 달리 키케로는 정말 의외로
카이사르나 폼페이우스도 아닌 그가 파르티아와 싸워서 이겨봤다는 희한한 기록을 남기게 됐던 것이다.
- 에이드리언 골즈워디 저 "로마와 페르시아",
앤서니 에버릿 저 "로마의 전설 키케로" 에서